1936년 10월에 『조광』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성북동에 사는 주인공은 장마 기간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아내와의 다툼도 잦아진다. 오랜만에 집을 나선 주인공은 오랜만에 사대문 안으로 외출을 한다. 소설은 여기에서 생기는 이야기들을 다룬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일상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자아의 내면적 성찰을 강조한 이태준 후기 단편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53년 10월 『현대공론』에 실린 수필이다. 김환기는 1944년부터 김용준이 물려준 수향산방(노시산방)에서 살았다. 모친을 모시게 되면서 그는 종로구 원서동으로 이사를 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와 집을 마련하였다. 그는 교통이 불편하지만 우물물을 마실 수 있고, 녹음이 우거져 있어 월광이 다른 것이 성북동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김환기의 성북동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난다.
1961년 10월 23일부터 1962년 7월 1일까지 총 250회에 걸쳐 『경향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1960년대 박경리 작품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며, 연재 후 곧바로 단행본이 나오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박경리가 『노을진 들녘』 연재 전에 이미 24회를 집필해놓았으며, 5년전부터 구상해왔다는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박경리의 애정을 알 수 있다. 박경리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인 불륜, 절손, 억지결혼이 골고루 드러나며, "박경리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핵심 모티프와 작가의식이 담긴 소설"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성북동에 소재하였던 청조사가 발간한 월간문예잡지이다. 1934년 8월 변서봉·유춘정·박귀송·이준숙·황백영·정규창 등이 창간하여, 1936년 9월 통권 21호로 종간되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노자영으로 그가 성북동 문화주택에 살며 청조사를 직접 운영하였기 때문에 노자영의 개성과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의 낭만적 감상주의로 일관되었는데 『신인문학』 역시 대중오락지적 요소가 다분하였다. 이에 대해 계용묵은 「한국문단 측면사」에서 노자영이 창간한 문학잡지 『신인문학』은 신인들을 발굴하고 기성문인층의 창작도 발표되었다는 의의가 있으나 가십란에 가십으로 판매 부수를 올렸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성북구 성북동과 종로구 혜화동의 경계에 뒤치한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이다.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불렸으며, 사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사대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했다. 도성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자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1511년(중종 6)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일제강점기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을 내며 헐렸으나, 1994년 10월 18일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성북구 삼선교로16길 118(삼선동2가 391-4)에 위치한 사립 중학교(여)이다. 한성여자중학교는 1945년 10월에 김의형(金義衡)이 기존 경성여자기예학교를 인수하여 1946년 7월에 6년제 고등중학교인 한성여학교로 출발하였고, 1951년 학제변경에 따라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1953년 1월에는 재단법인 한성학원이 설립 인가를 받았고, 1964년 1월에 학교법인으로 개편하였다. 1960년 한성여자중학교에 재학중이던 진영숙이 4월 19일 데모에 나갔다가 희생당하자 한성여자중학교에서는 묘비를 기증하고 동급생이 졸업하는 1962년 2월,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2025년 기준 352명이 재학 중이다.